[소고] 마소 30주년에 부쳐…

@codemaru · November 19, 2013 · 15 min read

96년 초여름. 생일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물어보는 친구 녀석에게 난 겁 없이 마이크로소프트웨어라는 잡지를 말했다. 중학생이라 큰 돈이 없었던 친구 녀석은 고맙게도 용돈을 탈탈 털어서 마소를 선물해줬다.. 그게 내 인생 첫 번째 마소였다. 친구의 선물이기도 했고 너무 신기하기도 했기에 난 마소를 신주단지 모시듯이 두고는 심심할 때마다 펼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가 그 당시 마소에 실린 글 중에 이해하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시쳇말로 흰 건 여백이고, 검은 건 글인 수준이었다. 하지만 난 마소를 읽고, 또 읽으면서 막연하게 내가 어른이 된다면 여기 글을 쓴 아저씨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마소, 그리고 프로그래머

고등학교 시절부터는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동아리에서 회비로 정기 구독을 했기에 언제나 최신 마소를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대학생 때에는 도서관에서 이번 달 마소를 모두 공짜로 볼 수 있었지만 국내 유일의 프로그래밍 잡지가 폐간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정기 구독을 하기도 했었다 (그시절 프로그램 세계라는 프로그래밍 잡지가 폐간 됐었다). 마소 필자가 된 이후로는 지금까지 증정본을 받아서 보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결국 난생처음 생일 선물로 마소를 받은 다음 거의 17년 동안 마소를 끼고 살았던 셈이다.

17년을 함께한 마소를 돌아보면 역설적이게도 기술 보다는 사람이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 비베 관련 글을 많이 쓰시던 신승근님의 비베 책만 몇 천 권 읽었다는 글을 보면서는 대학교 연구 도서관에 있는 전공 관련 서적을 모조리 다 읽어 버리겠다는 패기에 불타 오르기도 했었고, 나성언님의 인터페이스 저널을 통해서 선배 프로그래머들은 일상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조금이나마 훔쳐볼 수 있었다. 안윤호님의 칼럼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저분의 내공은 얼마나 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매번 연재되는 글들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주니어 코너에 있었던 황헌주님의 초보 개발자의 일기장을 보면서는 나도 막연하게 직업 프로그래머로 생활하게 된다면 저런 일상을 보낼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고, 터보 C 정복의 저자로 유명하신 임인건님 같은 대가의 짤막한 인터뷰라도 실리는 날에는 그 글을 끼고 다니면서 나도 먼 훗날 반드시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되고야 말겠다는 꿈을 키웠다. 일면식도 없는 김성우님은 가장 훌륭한 글쓰기 선생님이었다. 엔지니어에게 글쓰기가 왜 중요한지, 재미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길잡이가 되어준 고마운 글들을 많이 써주셨다.

또한 마소는 나에게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해 준 잡지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주변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흔치 않았다. 대부분의 친구 녀석들은 메모리를 최적화 시켜서 19금 게임을 실행시키는 정도의 컴퓨터 지식으로 만족했다. 그 프로그램들이 어떤 원리로 동작하는지,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친구들은 없었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은 더 몰랐다. 호기심을 해결할 창구도 없었고, 같은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할만한 친구도 전무했다. 외딴 섬에 혼자 떨어져 있는 느낌이었던 나에게 마소는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고마운 존재였다.

학생 시절 나는 마소를 통해서 먼저 이 길을 걸어간 선배 프로그래머들의 주옥 같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직업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동안에 마소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프로그래머들의 다양한 고민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창문과도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마소는 항상 나에게 가장 기술적인 잡지인 동시에 가장 사람 냄새 나는 잡지였다.

전업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프로그래머가 그렇지만 처음 시작할 때에는 누구나 위대한 프로그래머를 꿈꾼다. 몇 일 은둔해서는 새로운 구조의 그래픽 엔진을 뚝딱 만들어내는 존 카맥, 겨울 방학에 심심해서 만들기 시작한 운영체제가 전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오픈소스 운영체제가 된 리누스 토발즈,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 심심해서 만든 파이썬이 NASA에서도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가 된 귀도 반 로섬 같은 전설의 프로그래머를 상상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들은 열심이만 하면 자신도 그런 위대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진다.

처음 시작하던 시절 나 또한 그런 생각이 있었다. 노력하면 위대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내가 제법 똑똑한 프로그래머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물론 그런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0년 정도가 지난 지금 내가 업계에서 배운 한 가지 사실은 나는 그냥 철저하게 평범한 지적 수준을 가진 보통 프로그래머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난 굉장히 심각한 자괴감에 빠졌었다. 갑자기 방향을 잃은 느낌이었다. 아마 프로그래머란 직업에 더 강한 열망을 가진 독자일수록 먼 훗날 나와 같은 상황에 봉착할 확률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난 방황의 과정 속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부족한 내가 지금까지 직업 프로그래머로 살아가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기에 잠깐 소개해볼까 한다.

내가 알게 된 첫 번째 사실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위대한 프로그래머가 반드시 필요한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도 있지만, 평범한 프로그래머도 풀 수 있는 가벼운 문제들도 산재해 있다. 당연히 천재 프로그래머 몇 명이 모두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조만가지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통 수준의 프로그래머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가 모두 다 리누스 토발즈나 존 카맥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사람을 이해하는 프로그래머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10년이란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래머들을 만났다. 창업을 한 이후에는 개발사에 SDK를 공급하는 업무적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외부 개발자들과 협업할 기회가 많았다. 그렇게 많은 프로그래머들을 만났는데 사람을 이해하는 프로그래머는 정말 드물었다. 기계와 친숙하고 코딩에 능숙하지만 사람과의 의사 소통에는 젬병인 프로그래머가 비일비재했다. 물론 전문 지식은 다소 부족하지만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난 프로그래머도 간혹 있었다. 협업이란 측면에서는 당연히 후자 쪽이 훨씬 일하기 수월했다. 이는 의사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만으로도 아주 특별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사소통 능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답은 기계나 전공 서적에 있지 않다. 바로 인문학에 있다. 인문학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그래머가 철학과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전과 철학 책이 재미 없는 독자라면 연애를 적극 권장해 주고 싶다. 자신과 다른 타인을 이해하고 자신의 바닥을 경험하는데 연애만큼 좋은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60살의 마소를 꿈꾸며

많은 사람들이 마소가 최신 트렌드를 충분히 반영하는 잡지가 되기를,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는 고급 지식이 실리는 잡지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난 여기에 조금 회의적이다. 활자화돼서 인쇄되는 시간에 벌써 트렌드는 넘어가기 마련이다. 그 정도로 요즘은 빠르다. 인터넷에 없는 고급 지식이 담기길 소망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요즘은 스택오버플로우에 없다면 아직까지 궁금해 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구글에 없다면 이 세상에는 없는 지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터넷과 커뮤니티가 발달했다. 사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지식이 인터넷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특히나 IT쪽 정보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그러니 거기에도 없는 정보를 담는다는 말은 조금 어폐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마소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프로그래머의 이야기를 담는 잡지가 되기를 소망한다. 앞서간 선배 프로그래머의 조언, 우리 시대 프로그래머의 생각, 그리고 프로그래머를 꿈꾸는 학생들의 고민을 충실하게 담고 있는 잡지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가 닿을 수 없는 넘사벽 개발자들의 이야기는 인터넷에도 책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2013년 대한민국을 함께 살아가는 프로그래머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잡지는 단 하나 마소 밖에는 없다. 마소가 더 많은 프로그래머들에게 사람 냄새 풍기는 잡지로 다가가기를 희망해 본다.

@codemaru
돌아보니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런 나의 모든 소소한 일상과 배움을 기록한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한 개인의 관점이고 의견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는 1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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