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메일 메트릭

@codemaru · June 19, 2014 · 17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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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엄마 뱃속부터 테일러리즘을 싫어했다고 느낀다. 2008년 여름 처음 팀장이 되면서 약간의 관리 업무를 맡게 될 당시에도 그런 생각은 확고했다. 자유와 여유, 그 모든 것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무한대의 창조성을 발휘할 것이라 믿었다. 동일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모두 공평하게 노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안타깝게도 나의 가설은 틀린 것처럼 보였다. 2011년 10월에 작성한 아래 노트는 그런 생각 변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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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에 작성한 노트

물론 난 지금도 테일러리즘을 싫어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관리한다는 생각 자체도 너무 우습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인간끼리 뭘 관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기존의 생각과는 다른 몇 가지 생각은 확실하게 변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일등은 일등대로의 방식이 있고, 꼴찌는 꼴찌의 방식이 있다는 생각이다. 많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좋은 기업의 조건이나 관리 방식은 사실상 내가 생각했을 때에는 일등의 방식이다. 최고의 인재를 모아서 물쓰듯 자본을 쓸 수 있는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들이란 이야기다. 동일한 사항을 그렇지 않은 환경에 적용한다면 당연히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그맘때부터 난 한 가지 생각은 뚜렸했다. 1) 사람은 관리할 수 없지만 업무는 관리할 수 있다. 2) 측정 불가능한 업무는 관리 불가능하다. 3) 자동화된 측정이 아닌 사람을 통한 측정은 효과가 불투명하다. 이런 전제 아래에서 나는 업무와 관련된 상당히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직원들에게 공유하기도 했고, 일부는 그냥 혼자 데이터를 보고 넘기기도 하는 형태다. 이런 내용을 토대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직원들의 업무에는 종류를 불문하고 엄청난 양의 불균형이 존재하고, 그것에 대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자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데이터 중에 하나가 메일 메트릭이다. 우리 회사 지원 업무의 상당수는 메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그 업무 회수를 측정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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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명의 직원이 근 한달간 메일 업무를 한 내용을 정리한 그래프다. 일반이라고 표시된 것은 업데이트가 아닌 일반 메일로 주로 업체에서 특정 사항에 대한 문의나 요청을 한 것에 대한 회신의 회수를 의미하고, 업데이트는 우리 제품의 새로운 업데이트 안내 메일을 발송한 회수를 표시한 것이다. 그러니 일반은 약간 (업체에 의해서 강제된) 비자발적 메일, 업데이트는 자발적 메일 발송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업데이트 또한 요청에 의해서 발송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100% 자발적 메일 발송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그래프를 살펴보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은 당연 1번 직원이다. 이 직원이 지난 한 달간 발송한 모든 메일은 3번 직원부터 7번 직원까지의 메일을 다 합친 것 보다 많다. 자발적 메일 발송이라 볼 수 있는 업데이트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한데 1번 직원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을 다 합친 수치와 맞먹는다는 점이다. 얜 뭐지? 슈퍼맨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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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래프는 해당 기간 동안에 하루 평균 몇 통의 메일을 보냈는지를 나타내는 그래프다. 1번 직원의 고충이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나머지 직원과의 비교는 둘째 치더라도 이 직원이 하루 평균 7통의 메일을 보낸다는 사실에서 심각한 격무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시간 근무라고 가정했을 때 통상적으로 한 시간에 한 통의 메일을 보냈다는 점이다. 업무 일수가 아닌 단순 기간으로 나눈 통계이기 때문에 업무 일수로 나눈다면 그 정도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실제로 1번 직원은 “요즘 정말 정신없이 바빠서 뭔가 다른 걸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말이 그저 하는 엄살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그래프인 것 같아 더 씁쓸하다.

이쯤되면 몇 가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왜 이 친구들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이 정도로 심각한 불평등 상황에 직면했는데 이 상황을 개선하려고 하지 않을까가 그 첫번째 의문이다. 이 정도면 사실 데이터를 뽑지 않아도 1번 직원이 과도하게 격무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할 법하고 업무 배분을 좀 더 새롭게 할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왜 다른 직원들은 1번 직원의 이런 초과 업무에 대해서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옆에 동료가 평균 한 시간에 한통의 메일을 써야 할 정도로 정신이 없다면 옆에서 보기 딱해서라도 몇 개 정도는 내가 도와줄게요라고 말할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점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그런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옆에서 보기엔 참 화기애애해 보인다.

이런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더 재미난 사실은 저 업무에 참여한 모든 직원이 다들 우린 똑같이 힘들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3, 4, 5번 직원은 비슷한 수준의 업무 강도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이 1, 2번 직원과 똑같이 힘들다고 한다면 그건 분명 공평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상에 아주 근소한 차이가 있다면 3, 4, 5, 6, 7번 직원은 불만을 느끼거나, 불공평하다고 느끼거나, 내가 개인적인 친밀감 같은 것을 토대로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공정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1, 2번 직원은 다소 실망할 것이고, 불균등한 보상이 주어진다면 3, 4, 5, 6, 7번 직원이 실망할 것이다. 벤담의 공리주의를 따른다면 균등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 맞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쳐다보는 입장은 또 그게 마음이 편하진 않다. 그래서 다른 부분에서 그들이 더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기회적인 요소를 추가해서 균형을 맞추고 싶어한다. 그런데 또 웃긴것은 기회적인 요소를 여기에다 추가를 하면 그 기회에서 제외된 나머지 직원들은 내가 친밀감 따위를 토대로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공평하게 행복한 상황은 애초에 만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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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좀 더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과만 바라볼 것이 아닌 원인도 같이 고려해야 한다. 그런 이면을 보여주는 것이 이 그래프다. 그래프는 지난 한달간 우리에게 적어도 1회 이상 요청 메일을 보낸 업체를 보여주고 있다. 60여개 정도의 업체에서 1통 이상의 요청이나 문의 메일을 보냈는데 살펴보면 데이터가 좀 재미있다. 바로 요청의 대부분을 자주 요청하는 업체에서 거의 독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나 1위를 기록한 업체는 근 100여번의 요청을 했는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려 16%에 이른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업체 담당자가 1번 직원이다. 이 업체는 일 평균 2.43통의 요청 메일을 보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거기에 병목 지점이 있다. 즉, 그 업체가 지속적으로 뭔가를 요청하는 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요청을하지 않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개선된다면 100통의 메일을 처리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 업체에서 요청하는 상당수 메일을 살펴보면 개선할 여지가 있는 요청 메일이다.

물론 1번 업체의 요청 메일 하나를 개선한다고 1번 직원의 격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완화되겠지만 그 요청 메일을 차치하더라도 다른 직원과의 격차는 굉장히 크다. 당연히 유능한 관리자라면 그 격차가 줄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면 저 모든 직원들이 일 평균 3통 정도의 메일을 처리하는 상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이 넘어간다면 추가 인원 투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테일러 할아버지, 아니 고조 할아버지가 와도 저 상황을 개선할 수는 없다. 아주 잠깐 동안의 평형 상태는 만들 수 있어도 한달만 지나면 딱 지금의 그래프와 똑같은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과거 데이터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업무가 균등해지기 위한 유일한 길은 업무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불균등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걸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에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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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직원들한테 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가 체인이 빠진 자전거 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있다. 우리 회사 직원들은 다들 열심히 일한다. 옆에서 보기 안스러울 정도로 열심이다. 그런데 가끔 그 이면을 살펴보면 체인이 빠진 자전거 바퀴를 열심히 돌리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많다. 조금만 변화를 주어도 극적으로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음에도 그런 변화를 아무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바퀴를 더 열심히 굴리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현실에 치여서 그러질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래서는 전투에선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전쟁에서는 패할 수 밖에 없다.

작은 업체는 항상 모든 게 부족하다. 돈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하고, 시간도 부족하다. 예전에 우리가 1.0 버전을 만들고 있을 때 회사에 같이 계셨던 분은 그랬었다. 우리는 돈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1.0을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게 없다. 그때 난 모든게 부족해도 2.0을 설계하고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마 그때 우리가 1.0만 만들고 있었다면 지금도 1.0만 있거나 아니면 망했을 것이다. 현실이 아무리 각박하고 초라해도 미래를 위해서 일정 시간을 떼어내서 투자해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유일한 길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언젠간 우리 회사 직원들도 다들 이런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스스로 자신의 업무를 측정하고, 분석해서 문제점을 찾고, 개선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토론하는 그런 분위기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한편으론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기도 하다.

@code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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