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좋은 날

@codemaru · February 13, 2015 · 14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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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9. FRI, 회사 창업하고 처음으로 직원들에게 인센티브가 지급됐다. 만으로 꼭 8년 하고도 3개월 정도가 된 시점.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26살에 처음 창업 대열에 끼어들던 나는 한 3년 하면 성공할 줄 알았었다. 지금 대표를 하고 있는 형은 처음 대표로 취임하던 날 2년만 해보자는 이야기를 했었다. 우리는 너무 어렸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예측은 다 빗나갔다. 3년이 지났을 땐 5년 정도 하면 성공할 줄 알았다. 5년이 지났을 땐 더 이상 날짜를 기약하지 않게 되었다. 나이도 들었고, 목표 보다는 과정을 보는 눈도 생겼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희망고문 같은 판타지가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매일같이 쪽팔리지 말자, 좋은 날이 올거야,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면서 살았다.

인센티브가 지급되던 장면은 나에겐 약간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서 인센티브를 받고 기분 좋아하는 직원들이 아닌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하지만 있지 못하는 사람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짧은 의식같은 행사가 끝났을 무렵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었다. 왠지 이 문장이 지금의 모든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All happy families are alike; each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1

회사를 하면서 내가 기억하는 핵심 장면들이 몇 있다. 첫 번째 장면은 2007년 초, 우리가 처음 게임 보안 제품을 만들기로 한 날이었다. 모 게임사에서 펀딩을 해서 시작하게 된 사업이었는데 지금도 별볼일 없는 우리를 믿고 투자해준 그 회사가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이 일을 우리 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빅딜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지금 대표인 형이 그 계약을 성사시켰는데, 그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듬해 우리 회사의 두 번째 대표가 되었다.

두 번째 장면은 2008년 중순, 우리가 만든 제품으로 처음 매출을 올린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조촐한 첫 매출이었지만 통장에 외화가 꽃혔다는 이유로 우리는 즐거워하며 회식을 했었다.

세 번째 장면에 오늘을 포함시키기로 했다. 얼마가 됐든 약속한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 줄 수 있다는 게 쉬운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일이 처음이기도 하고 회사가 여기까지 잘 도착했다는 사실이 대견하기도 한 것 같아 포함시키기로 했다.

#2

이상하게도 이 좋은 날 옛날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제품 소개차 나간 미팅 자리에서 제품이 엣지 없다는 소리를 들었던 날도 있었고, 제품은 좋은데 검증이 안 된 것 같다며 레퍼런스를 확보하고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날도 많았다. 회사가 망하면 어쩌냐는 소리를 들었던 수많은 자리가 있었고, 세번씩이나 똑같은 업체에 미팅을 하고는 돌아오는 차 안에 난데없이 거미가 나타난 적도 있었다. 더 어처구니없게도 우린 그걸 보며 이게 아침 거미인지 밤 거미인지 하면서 미신을 뒤적거리며 그 업체와 계약이 될지 안 될지를 점치기도 했었다. 정말 좋은 기회라고 싱글벙글하면서 나간 미팅 자리가 우리를 음해하는 세력이 꾸민 장례식 자리가 됐었던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있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향수에 젖어서는 예전 일기장을 뒤적거려 보았다. 난 특이하게도 힘들면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는데, 회사를 하면서는 2010년, 2011년 일기가 많다. 회사를 하고 제법 시간이 흐르기도 한데다 그 당시에는 마치 모든 일이 멈춰버린 것 같은 상황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꿈틀거릴수록 뭔가 점점 더 나빠지는 느낌들이 나를 엄습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래서 그 당시에는 제법 부지런히 일기를 썼었다. 다시 살펴보니 회사도 나도 귀엽기도 하고 깜찍하기도 하고 그렇다.

2010. 01. 27. WED

그날 밤을 새며 M과 둘이서 HACK.DLL을 분석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사실 분석에 있어서는 우리 둘 다 초보였다. 우리는 Themida로 패킹된 프로그램을 디버깅 하는 방법도 Yoda Crypter로 패킹된 DLL을 언팩하는 방법도 몰랐다. 닥치고 초보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사내에 이런 교육이 절실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게임 보안 제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해킹툴 DLL을 분석할 수 있는 사람 한 명 없다니, 이 얼마나 아니러니 한 사실인가? 좀 쪽 팔리는 사실이기도 했다.

2010. 01. 28. THU

저녁에는 K가 첫 월급 턱이라고 밥을 샀다. 개발팀, QA팀 합해서 7명이 가서 순두부를 먹었다. 3명이었던 팀원이 갑자기 이렇게 늘어나니 관리가 통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제는 회식을 한 번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인원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팀이 점점 나의 손을 떠나는 느낌이 많이 든다.

요즘은 회사의 느낌이 죽 끓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마치 사인 곡선처럼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 점점 더 자신감을 잃어가는 과정은 아닌지 모르겠다.

2010. 01. 30. SAT

거의 밤을 새우다 싶이 하고는 오후 2시에 퇴근을 했다. H도 밤샘 작업이 있다고 그때 마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HACK.DLL 분석 작업 마무리를 못했다. 월요일에 T에게 헬프 메일을 보내야겠다. 찜찜한 기분으로 집으로 왔다.

엉망진창인 집. 내 생활의 한 조각, 아니 전부를 보여주는듯 했다. 내 방은 엉망진창이고, 그건 내 생활 또한 엉망진창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일주일을 돌아본다. 내가 이 방에서 한 일이라곤 쓰러져 몇 시간 잠을 자고 씻고 출근하는 것이 전부였다. 온통 양말과 수건으로 널부러진 방을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정리가 필요했다. 이 방에도, 내 삶에도…

2010. 02. 21. SUN

느즈막히 출근을 했다. 어제 작업하던 V 모듈 마무리 작업이 있었다. CDN에서 N 코드를 다운로드 받아서 실행하는 부분을 추가할 계획이었다. 작업을 하려고 PC를 켜고 Visual Studio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늘상 하듯이 브라우저를 켜고 모니터링 사이트를 방문해 보고는 했다. 그러다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다. XIGNCODE로 영문 위키 페이지가 생성되어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내용은 안습이었다. 최악의 보안 프로그램이다. 막는게 하나도 없다와 같은 이야기였다. 조금 충격적이었다. 사실 많이 충격적이었다. 나중에 다시 보니 페이지는 지워지고 없었다.

최고의 보안 제품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3년을 넘게 달려왔다. 그런데 ‘worst anti cheat’라는 수식어라니.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하고, 좀 얼떨떨 하기도 하고 그랬다. 한동안은 코딩도 못했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유저들이 우리 제품을 인식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10. 02. 23. TUE

엄청난 하루였다. 어제 수정한 V 모듈이 오늘 패치된 것이다. 패치는 정말 감동 그 자체였다. 커뮤니티에는 핵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좋아하는 글들이 올라왔고 핵의 숙주인 DG에는 빨간불이 들어왔다. N 코드는 의외로 별 문제 없이 잘 동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V 모듈에 있었다. 새롭게 추가한 DirectX 훅 체크 코드의 if문이 엉뚱하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else if가 되어야 하는데 독립 if문으로 해버린 사소한 실수였다. 그 덕분에 게임 스트리밍 서비스를 사용하는 많은 정상 유저가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코드를 고치는 것은 간단했지만 실제 업데이트에 적용 되러면 얼마간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다시한번 실시간 업데이트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x3beta4.png) **가장 힘들었던 그해 6월, 우리의 세번째 판올림 XIGNCODE3 베타 버전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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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년간 700번의 새로운 엔진 빌드. 우리는 거의 매일 새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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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가 얻은 것: ‘worst anti cheat’에서 조금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평가들

#3

세상에 훨씬 더 좋고 훨씬 더 대단한 회사들이 많이 있다. 대단하지 않은 작은 성취지만 기분 좋은 마음에 몇 자 끄적여 봤다. 왜냐하면 난 용뼈를 먹고도 뛸듯이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거기에 비하면 이건 훨씬 더 대단한 일 아닐까낭?!…

![](./wow.png) **이 별거도 아닌 아이템 하나 먹고 난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었다.**

와우에 적용될 그 날을 기다리며…

@codemaru
돌아보니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런 나의 모든 소소한 일상과 배움을 기록한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한 개인의 관점이고 의견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는 1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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