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Mar
2010
Posted in: 양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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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누나


작은 누나
by 신영진(YoungJin Shin), codewiz at gmail.com, @codemaru, http://www.jiniya.net

#0.
둘째…
가장 먼저 할글을 깨우쳤다는 사람…
매일 유치원까지 나를 데리러 왔던 사람…
배구공은 가볍다고 농구공으로 피구를 했던 사람…
눈부시게 새하얀 마음을 가진 사람…
운동을 제일 잘했던 사람…
여자 골목대장…
미술을 좋아했던 사람, 그리고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사람…
가장 예술 감각이 좋은 사람…
물폭탄을 도시락 통에 넣고 다닌 사람…
비행 청소년의 항목을 가장 많이 수행해 본 사람…
성격이 제일 좋은 사람…
자기 일은 세상이 두쪽나도 똑부러지게 하는 사람…
가요 테이프를 가장 많이 모은 사람…
돈관리를 제일 못하는 사람…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많은 사람…
유일하게 석사 과정을 하고 있는 사람…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 동시에 가장 가족을 많이 이해하는 사람…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
주량이 쩌는 사람…
둘째라서 가장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했던 사람…
유치원 원장…

#1
아주 어렸을 때 이야기다. 둘째 누나는 큰 누나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피아노를 배우면 처음에 악보 보는 법을 같이 배우게 마련이다. 몇 분 음표 같은 것들을 읽고 쓰는 법들 말이다. 한참을 수업 받았던 작은 누나는 한 날 큰 누나의 음악 시험을 보게 되었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몇 분 음표 따위를 적는 시험이었다. 큰 누나는 시험을 보라고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방에는 나와 누나 둘만 남게 되었다. 눈치를 살핀다. 모르는 눈치다. 나는 누나를 부추긴다. 답을 베끼라고 말이다. 악마의 속삭임에 한참을 고민한다. 그러다 정녕 모르겠는지 답을 베끼고 말았다.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그 사건을 가지고 폭로한다고 협박하며 한달을 작은 누나를 조종했다. 작은 누나는 그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서 한 달 넘는 기간동안 나에게 많은 것들을 양보했다. 누나는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나는 미술 학원을 제법 오래 다녔다. 그런데도 나는 상장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지금 느끼기에 나는 너무 오래 크레파스를 붙잡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그닥 소질이 있지도 않았다. 미술 학원을 몇 년 다니면서 내가 배운 거라고는 나뭇잎을 붓으로 터치하는 기법 밖에는 없었다. 그런 나와는 반대로 작은 누나는 미술 학원을 거의 다니지 않았음에도 온동네 상장은 휩쓸고 다녔다. 누나는 정말 그 방면에는 소질이 있었다. 누나의 방황의 시기가 끝났을 때, 누나는 미술 대학을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런 누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누나가 미대를 갔으면 정말 멋진 화가가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집에도 한 명 쯤은 진지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뻔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나의 유년기 시절의 앞 장을 점령했던 한 사람. 둘째 누나가 결혼을 한다고 한다. 가장 최후까지 버텨 주었기에 나의 방패 역할을 몇 년간 충실히 더 수행해 줄 것이라 믿었던 나의 환상은 깨지고 말았다. 누나의 인생, 전반부는 그녀의 순수한 마음을 그대로 사회에 투영하면서 빚어진 실수로 점철된 나날들이었다. 이제는 누나의 인생, 그 후반전이 시작된다. 후반전에는 그 전반부의 실수들을 조금은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잊었던 누나의 꿈을 찾는 시간이 되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그냥 마지막 바램이 있다면, 제발 제발 그냥 아줌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교 시절에 토플러를 읽고, 대학 교육을 4년이나 받은 큰 누나가 그냥 아줌마가 되어 있는 모습은 정말 나에게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3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삼만사천가지 이야기들 중에 가장 신빙성 있는 한 가지 이유를 선택해 보자면 그건 바로 작은 누나의 존재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은 딸이 아닌 아들이 태어났다면 자식을 더 이상 늘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누나들과 정말 많은 일들을 같이 했다. 심지어는 목욕탕을 같이 가기도 했다. (<- 예전에는 이런 일들이 종종 있었다. 물론 진짜 진짜 어릴때의 이야기다. 나의 믿지 못할 상황 기억력 덕에 기억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누나들과의 끈이 끊어진 첫 번째 사건은 작은 누나의 졸업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독립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수많은 도움을 주던 사람들이 나에게서 일순간 사라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그 전에 같이 하던 수많은 일들을 혼자해야 했다. 그런 맥락에서 누나의 결혼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하게 다가온다.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탄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모든 형용사를 동원해서 축복해 주어야 할 작은 누나의 결혼 앞에서 서글픈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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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www.YHKim.com drvoss

    내가 보기엔 다들 행복한 일만 남았는데요 ^^

  • http://archmond.net/ 아크몬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멋진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 권종원

    저도 누나 둘에 막내 인데요 공감이 많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