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 우공이산의 지혜

@codemaru · June 17, 2015 · 11 min read

나에게 20살은 자유를 의미했다. 경제 활동을 시작하면서 난 부모님에게서 독릴할 수 있었고, 모든 결정을 내 멋대로 할 수 있었다. 대학도 그랬다. 난 1년 동안 거의 학교에 가지 않았다. 물론 학교는 갔었지만 수업을 듣지 않았다. 사실 내 수업보다 여자친구 수업을 더 많이 들었었다. 당연히 나의 성적표는 대부분 F로 채워졌다. F가 아닌 과목은 거의 대부분 내 앞에 있었던 신명진이란 여자 아이가 출석을 부를 때 내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잘못 들어서 대출한 과목이었다. 학사경고였다. 시쳇말로 쓰리고면 제적이었기에 두번째 학사경고를 받았을 때 귀댁의 자녀가 위기에 처했다는 전화가 집으로 왔다. 내가 받았다면 난 제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다행이 엄마가 받았고 집에는 난리가 났다. 그 등살에 난 2학년 부터는 수업을 조금씩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참가한 기초 전자 전기 실험에서 그 형을 처음 만났다. 당시 난 병특을 준비하고 있었고, 그 형은 병특을 마치고 학교를 복학한 상태여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가끔 술도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나에게 형은 병특을 시작하면 영어 단어를 하루에 하나씩 외우라는 판에 박힌 조언을 해줬다. 진짜 정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형한테 욕을 할 뻔 했다. ㅋ~ 난 당현하게 형은 영어를 못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실험을 했고, 더 많이 친해졌고, 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 약간 놀랄만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한날은 형이 실험을 하러 오면서 뭘 보고 있기에 뭐냐고 하니깐 아이트리플이라고 했다. 난 IEEE를 그렇게 읽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학교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 잡지를 직접 구독하는 사람이 우리과에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랬다. 형은 나에게 싸게 구독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었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더 놀라운 사실을 접했다. 나에게 하루에 영어 단어를 하나씩 외우라고 조언했던 그 형이 학교 신문에 났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무려 ACM 대학생 논문 경진대회 대상을 수상했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난 놀래서 형한테 왜 그런 이야기를 안했냐니 대단한게 아니라서 말을 안했다는 허무한 대답을 들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런 대회에서 상을 탔냐고 도대체 어떤 논문이었냐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게 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형은 답했다. 그냥 앉아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써서 냈다고. 학비가 없어서 좀 더 간절했다는 더 어처구니 없는 대답. 멘붕~

난 병특을 시작했다.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형의 조언은 상콤하게 씹었다. 사실 생활하는데 영어가 그닥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영어 라이팅을 배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그러면서 그냥 형은 원래 타고날 때부터 머리가 좋았겠지, 엄마 뱃속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생각했다.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나의 병특도 어느새 끝이났다. 사실 돌아보니 너무 금방 끝이 났다. 난 영어 단어를 하나도 외우지 않았다. 형은 졸업을 했고 카이스트에 석사로 갔다. 학교 앞에서 한 번 만날 일이 있었다. 난 복학하면서 잔뜩 유학 거품이 들어 있었던터라 GRE를 준비한답시고는 겉멋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난 워드 스마트를 보면서 이런 단어를 내 평생에 한 번은 쓸까라면서 멘붕에 빠져있는데 형이 들어왔다. 옆에 책을 한 권 끼고 있었는데 날 좌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가 중딩인지 고딩인지 그때 보던 능률 보카를 끼고 온 것이다. 당시 형은 GRE를 준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GRE를 치던 시점이라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곤 형이 단어를 하나씩 외우라고 한 조언이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능률 보카에 형광펜을 칠하면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학 이펙트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 학기 반짝하고는 난 또 그냥 그런 학교 생활을 했다. 난 학점을 메꾸지도 못했고, 유학을 가지도 못했다. GRE는 한 번 쳐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빨리 포기했다. 반대로 형은 GRE에서 상당한 수준의 점수를 받았고, MIT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많이들 그 형은 원래 천재였고, 1학년부터 착실히 공부를 했으며, 그래서 그런 엄청난 결과를 얻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웃긴 사실은 그 형도 학사경고를 받았으며, 1학년 때에 술을 많이 마시고는 모텔을 간적이 있었다고 했다. 모텔에 가서도 술판이 한창 벌어졌는데 같이 술을 마시던 선배가 너무 술을 마니 마셔서 수영을 하자는 제안에 모텔 바닥에서 수영을 한적이 있었다고 했다. 차마 무엇과 함께 수영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난 여전히 우공이산의 지혜를 머리로만 이해한다. 회사에 2년만에 신입 개발자가 첫 출근을 했다. 난 제프리 리처의 Windows via C/C++을 건내며 앞으로 한달간 이 책만 씹어먹어도 위대한 시스템 프로그래머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똑같은 이야기를 난 몇 차례 했었는데 그 어떤 신입 개발자도 그 책을 씹어먹진 않았다. 너무 시시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난 이 바닥에서 10년을 일했고, 그래도 나름 못한다기 보다는 잘한다는 평을 받으면서 일했다. 개인적으로도 경쟁력은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100번도 더 읽었던 Windows via C/C++에서 힌트를 얻고 제프리 리처가 1999년도에 쓴 글을 읽으면서 감탄한다. 촌스럽다고 느끼지만 현실은 그렇다.

형을 마지막으로 본게 9년전 카이스트였던 것 같다. 그때 우리는 10년 후를 이야기 했었다. 같이 간 형은 입사한 대기업 부사장이 되겠다고 했고, 난 벤처기업을 차리겠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형은 미국에 가서 자리를 잡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년 초여름이면 꼭 10년이 된다. ㅎㅎ~ 같이 갔던 형은 여전히 그 대기업에 다니지만 부사장이 되기에는 아직 힘들어 보이고, 나는 그때 말한 것처럼 성공하진 못했지만 벤처를 시작하긴 했다. 형은 MIT 연구소로 스카웃되서 갔고, 여전히 MIT에 있다. 형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새벽녘이다. 그 옛날 400원짜리 캔커피 뽑아서는 전소 앞에 쪼롬히 앉아서 조교 씹던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이리도 빨리 흘렀다. 하루는 더디 흘러도, 10년은 훌쩍 가버리는 게 세월이 아닌가 싶다.

쉬워 보이는 것도 꾸준히 하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방법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른 길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정작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마치 병특 때의 나처럼 말이다.

@codemaru
돌아보니 좋은 날도 있었고, 나쁜 날도 있었다. 그런 나의 모든 소소한 일상과 배움을 기록한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한 개인의 관점이고 의견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는 1도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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